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야스쿠니 신사 (문단 편집) === 합사된 [[전쟁범죄자]] === [[파일:external/310b16191c85002e5a626a705a621ac3f1615a0f92ea6011bb2bc1d3a5596726.jpg|width=100%]] 야스쿠니 신사에는 1,068명의 전범이 합사되어 있다. 아래는 '''A급 전범'''만 나열.[* 평화에 대한 죄. A급 전범이 B, C급 전범보다 나쁜 것이 아니라, 하나의 분류 기준이다. 즉, 어쨌든 A급·B급·C급 모두 전범이고, 내용을 살펴보면 B급과 C급은 학살이나 살해에 관한 죄라서 죄질이 상대적으로 더 나쁘다.][* 긴 말 필요없이 [[치치시마섬 식인 사건]]의 주범인 [[다치바나 요시오]]가 여기 합사되어있다.] [[도쿄 전범 재판]]에 따르면 국제조약을 위반하여 침략전쟁을 기획, 시작, 수행한 사람들(평화에 대한 죄)이다. 스가모 형무소에서 수감되었으며 8명이 [[교수형]]을 당했다. ⚠️표시는 [[순국7사묘]]와 중복 합사된 전범이다. * '''[[도조 히데키]]⚠️'''(1884.12.30.~1948.12.23.) - 제40대 [[일본 총리]]이자 결정적으로 [[진주만]]을 습격하여 [[태평양 전쟁]]을 일으킨 '''주범'''. * '''[[기무라 헤이타로]]⚠️'''(1888.9.28.~1948.12.30.) - '''버마의 도살자(ビルマの とさつしゃ)'''라고 불리지만, [[포로]] [[학대]]를 방관했다는 것 말고는 [[제노사이드]]와 직접적인 연관을 찾기는 힘들다. 이 작자의 버마 전선 관련 처벌은 사실 일본군의 [[임팔 전투|버마 전선에서의 졸전]]과 [[동남아]] 전선에서 일어났던 [[바탄 죽음의 행진]] 같은 포로 학대 행위, [[죽음의 철도]]같은 민간인 강제 징용, 포로 강제 동원 및 학대 행위에 대한 버마 방면의 총사령관으로 받은 상징적인 처벌에 가깝다.[* 이 또한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. 언급된 두 사건 모두 그가 총사령관으로 부임받기 전 발생했던 사건이기 때문. 뭐가 됐든 포로 학대를 방치했기 때문에 무고한 사람은 절대로 아니다.][* 사실 이건 전임자였던 [[가와베 마사카즈]]의 작품. 행적만 보면 오히려 이쪽이 더 최악이다.][* 다만 [[인민일보|중국 공산당 기관지]] 해외판에 기재된 죄상에 따르면[[https://m.ajunews.com/view/20140126134930845|#]], 버마에서의 일본군의 악행과 그가 하나도 연관이 없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.] [[극동군사재판]] 판결문에 따르면 그가 실제로 처형된 이유는 육군차관 시절 [[중일전쟁]]과 [[태평양 전쟁]] 개전, 특히 [[진주만 공습]]에 관여했다는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. [[기무라 헤이타로|항목참조]] * '''[[도이하라 겐지]]⚠️'''(1883.8.8.~1948.12.23.) - [[관동군]] 사령관(1938~1940). 중국의 [[화북분리공작]]에 관여하였으며 포로 및 피억류자들에 대하여 야만적으로 대우하였다. 특히 삼광작전이라고도 불리는 [[신멸작전]]의 주동자로 악명이 높다. * '''[[이타가키 세이시로]]⚠️'''(1885.1.21.~1948.12.23.) - [[만주사변]]을 기획하였으며, 일제의 중국 침략에 관여하였다. * '''[[마쓰이 이와네]]⚠️'''(1878.7.27.~1948.12.30.) - 1937년 [[상하이]] 파견군 사령관 당시 부하들이 [[난징대학살]]을 자행했다. 마쓰이 이와네는 [[난징대학살]]이 일어날 당시 [[결핵]]으로 병가 중이었기 때문에 학살을 주도하지 않았고, 학살이 일어나기 전 민간인은 절대 죽이지 말 것을 당부했다. 실제로 난징대학살을 주도한 사람은 [[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]]. * '''[[무토 아키라]]⚠️'''(1892.12.15.~1948.12.30.) - 중국파견군 참모장(1937), 육군성 국무국장(1939~1942), 수마트라의 일본군 사단장(1942~1943), [[필리핀]] 방면군 참모장(1944~1945). 광범위한 지역의 침략과 [[난징대학살]]을 포함한 [[중국]]의 일련 사건들까지 폭 넒은 책임을 물었다. 다만 침략전쟁에 앞장선 죄는 있으나 마쓰이 이와네와 마찬가지로 학살 혐의와는 관련이 없다. * '''[[히로타 고키]]⚠️''' (1878.2.14.~1948.12.23.) - 제32대 총리이자 [[극동군사재판]]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. 처형당한 전범들 중 유일하게 문관 출신이었다. * '''우메즈 요시지로'''(1882.1.4.~1949.1.8.) - [[관동군]] 사령관, 육군참모총장 등을 지냈고, 전후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사망. [[1945년]] 9월 2일 도쿄 만의 미주리호 선상에서 [[시게미츠 마모루]]와 함께 항복 문서에 서명한 인물이다. * '''마츠오카 요스케'''(1880.3.3.~1946.6.26.) - [[일본 제국]]의 전 외무대신(1940~1941). [[국제연맹]]의 탈퇴를 주도적으로 이끌며 1937년 [[남만주철도]] 총재, [[나치 독일]] [[이탈리아 왕국]]와의 [[삼국동맹]]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[[1941년]] 소련-일본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였지만 대 소련 개전을 주장하였다. 대미정책에서도 강경론을 주장하였으며 [[도쿄 전범 재판]] 진행 중 병사하였다. * '''[[히라누마 기이치로]]'''(1867.9.28.~1952.8.22.) - 추밀원 의장(1936, 1945), 제35대 총리대신(1938.1~8), 내무대신(1940.12.~1941.7.)을 지내며 [[히로히토]]의 고문 역할을 담당하였다. [[국가신토]]를 장려하였으며 [[태평양 전쟁]] 기간 동안 영향력을 행사하였다. 국가주의 우익 단체 국본사를 조직하였다. 복역 중 1952년 초 석방되었으나 그 해 병사하였다. * '''[[고이소 구니아키]]''' (1880.3.22.~1950.11.3.) - 조선 총독(1942.5.29.~1944.7.22), 제41대 총리대신이자 극동국제재판에서 종신금고형을 선고받았고, 그럼 이후 1950년에 식도암으로 사망했다. * '''[[나가노 오사미]]'''(1880.6.15.~1947.1.5.) - 일본제국 38대 해군대신 당시에 [[진주만 공습]]을 승인한 사람으로, 체포는 되었지만 [[스가모 형무소]]에서 판결전에 폐렴으로 인한 폐결절으로 사망했다. * '''[[도고 시게노리]]'''(1882.12.10.~1950.7.23.) - [[태평양전쟁]] 당시 일본의 외무대신. 이 인물은 전쟁을 반대했다는 점, 아내가 [[유대인]]이라는 점, 그리고 [[조선]]에서 건너간 도공의 후손이라는 점 등 때문에 일본 극우주의자들이 되려 명단에서 빼라고 요구하기도 하는 인물이다. * '''시라토리 도시오'''(1887.6.8.~1949.6.3.) - 일본의 주 이탈리아 대사이자 국제 연명 탈퇴 공작을 펼쳤으며, 태평양 전쟁 이후 종신 금고형을 받았고, 이후 복역 도중 후두암으로 사망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